87. [최태호의 와인 한 잔] 특권의식
배가 정박할 때 어느 지점에 닻(anchor)을 내리면 그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근처를 맴돌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처음 입력된 정보가 이후의 의사결정과 판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을 마케팅에서 ‘앵커링 효과’라고 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가격에 대해 형성된 고정관념이 소비 습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마데이라 와인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 포르투갈의 포르토항.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앵커링 효과를 가장 잘 활용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부동산 협상이나 국제 거래에서 매우 높은 요구 조건으로 시작해 협상의 기준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양보를 통해 상대방이 이익을 얻었다고 느끼게 만들면서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또한, 중요한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Make America Great Again(MAGA)’ 같은 슬로건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청중이 그의 메시지를 쉽게 기억하게 하고,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구체적인 이야기처럼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복잡한 이슈를 더 쉽게 전달하고 청중과의 감정적 연결을 강화한다.
흔히 남보다 더 잘났다고 우쭐대거나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특별한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태도를 특권의식이라고 한다. 돈 지위 권력 명예가 주는 특권의식은 우대와 면제를 기대한다. 하지만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그만큼 사회와 남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책임감을 가지면 특권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TV 뉴스 진행자,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를 ‘앵커’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이길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앵커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권은 주어진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업무 수행과 관련된 규정과 권한에 근거해 행사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봉사 정신보다 특권의식이 많은 이유는 권력과 책임의 불균형, 업무에 대한 무관심 또는 부족한 역량, 경제적 보상 부족 등 다양한 요인들이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과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프랑스 요리계의 거장 알랭 뒤까스와 20년 넘게 호흡을 맞춘 수석 소믈리에 제라드 마종은 “소믈리에 업무의 핵심은 소비자의 요구와 기대에 맞춰 와인을 제안하는 일이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레스토랑에 한정되지 않는다. 포도밭을 다니며 다양한 테루아를 경험하고, 그곳에서 나는 와인을 시음하는 것도 모두 소믈리에의 업무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와인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새로운 와인을 마셔보고 싶어 하지만 돈과 시간 만 낭비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그냥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늘 마시게 된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 심리학자 ‘필립 조지 짐바르도’는 “인간의 행동은 타고난 성격적인 문제 보다는 환경적인 요인이나 사회적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바리스타가 커피를 전하는 방식이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맛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소믈리에가 와인을 전달하는 방식도 우리가 자주 마시는 와인 맛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선한 영향력을 주는 전문가들, 특권의식을 책임감으로 바꾸고 모든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앵커’이다. 그들의 선한 ‘앵커링 효과’가 넘치는 세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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