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의 와인 한 잔] 36. 와인의 숙성, 사회의 성숙

2021.04.04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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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몰도바 동방정교회의 수도사.


19세기 말 북미지역의 뿌리 해충 ‘필록세라’가 유입되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포도밭은 엄청난 피해를 본다. 이후 이탈리아나 스페인산 건포도에 설탕과 물을 섞는 등 원산지를 속이는 ‘가짜 와인’이 판을 치면서 실추된 프랑스 와인의 명성과 가격을 회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산지 표시제도이다. 1935년 시행된 이 제도는 포도 생산지역과 품종 등 와인 품질 요건 전반에 대한 규정을 법률로 정했다. 이후 다른 유럽 나라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면서 유럽 와인이 국제 와인 시장을 지배하는 버팀돌이 됐다.


하지만 최근 미국 호주 등 신대륙 국가의 와인 품질이 높아지면서 유럽 와인 생산자를 위협한다. 품질 유지를 위한 까다로운 규정으로 오히려 신대륙 와인과 경쟁에서 밀리게 되는 시대적 변화에 직면한 것이다. EU는 유럽 국가의 와인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시책을 시행하며, 유럽 주요 와인 생산국의 와인 규정이 수정·변화되고 있다.


세상은 ‘규율 사회’에서 ‘성숙 사회’로 변하고 있다. 규율 사회는 규격화된 개인, 각자 생산성에 따라 매겨지는 등급, 금지를 통한 규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성숙 사회는 정신적 풍요와 생활의 질적 향상이 최우선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사회다.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만, 보는 사람이나 제재가 없으면 쉽게 어기게 되는 규율은 많을수록 효력이 약해진다. 사회통념, 기존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 자연 귀의를 주장하며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성숙한 시대가 필요하다. 와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등급제도는 변화에 적응해야 할 시기에 직면했다.


최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만드는 좋은 와인이 많이 나오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캘거리대학 스틸 교수는 행복감이 높은 문화의 대표적 특성으로 ▷개인주의 ▷낮은 ‘권력 거리감(power distance)’ ▷낮은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를 꼽았다.

개인의 고유한 생각과 의지를 존중하는 개인주의 문화는 소중하다. 타인이나 집단의 목표에 의해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고 어떤 선택도 집단의 의지가 아닌 개인의 의사 표현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힘의 불공정한 사회적 분배에 대해 문화 구성원들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하는 ‘권력 거리감’이 높을수록 행복도가 낮으며 갑질 현상이 잦다. 불확실한 상황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는 불편함과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 성향이 클수록 행복감은 낮아진다.


19세기 말 가장 문명화되었던 나라 영국. 하지만 노동자의 삶은 비참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행복하지 못한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질풍노도 청년기를 거쳐 성숙한 한 사람이 되듯 사회의 가치도 변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과 풍미가 더해지는 와인처럼 생활의 질을 중시하고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한다면 우리 삶도 성숙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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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가톨릭대 와인전문가 과정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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